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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옳지 못한 재물을 모으지 마라 - 오리 이원익
작성자 상북중 등록일 14.03.01 조회수 1156
 영남 사람들이 이원익과 유성룡을 두고 말했다.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유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 


_ 남학명(1654~1722), <회은집(晦隱集)>중에서 

병법에서는 지휘관을 세 가지로 나눈다. 불가기(不可欺), 즉 속일 수 없는 지장(智將), 불인기(不忍欺), 곧 차마 못 속이는 덕장(德將), 불감기(不敢欺) 감히 못 속이는 맹장(猛將)이 그것이다. 병법에 따르면 유성룡은 지장, 이원익은 덕장에 해당한다. ‘천벌을 받지 어떻게 그 사람을 속일 수 있을까?’ 사람들이 이렇게 평했다던 이원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것처럼 가냘프다’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일대는 이원익이 말년에 여생을 보내던 곳으로 인조(1623∼1649)가 하사한 관감당(觀感堂), 사당인 오리영우(梧里影宇), 충현서원지(忠賢書院址), 종택 등 이원익 관련 문화재가 몰려있다. 이를 관리, 운영하는 곳이 이원익 종택에서 건립한 충현박물관이다.


박물관 내부 ‘충현관’에 들어서면 한눈에도 명필로 보이는 커다란 글씨를 만난다. 이것은 ‘인조묘정배향교서’ 즉, 인조묘정에 이원익을 배향하도록 한 효종의 교서다. 그 내용 중에 “아, 우리 종영(이원익)은 참으로 나라의 원로이시다.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할 것처럼 가냘프나 관직을 맡으면 늠름하여 범하기 어렵고,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지만 일을 만나면 패연히 여유가 있다”라는 재미있는 구절이 나온다. 


이어 이원익의 시, 편지, 문집, 유서 등을 볼 수 있고 이원익의 영정에 앞에서 발걸음이 멈춰진다. 각기 다른 시기에 제작된 4개의 영정은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영정에 나타난 이원익은 얼굴이 작고 갸름하다. 그리고 키가 작아 보이지만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실제 이원익은 키가 3척이 겨우 넘었다고 한다. 비록 몸은 가냘프지만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5번이나 영의정에 오른 큰 인물이다. 


이원익은 태종의 왕자 익녕군 이치의 4대손인 이억재와 어머니 동래군 부인 정씨의 아들로 1547년(명종 2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다. ‘오리 정승’이라고 불리던 이원익의 업적은 열거하기 힘들 정도 화려하다. 


병졸의 입번(入番)제도를 개선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안주목사(安州牧使) 시절에는 뽕나무를 권장하여 ‘이공상(李公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또한 그 유명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세금부담을 덜어주었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 탈환에 지략을 세웠으며,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는데 결정적으로 힘을 쓰는 등 왜란 극복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유폐시키자 이를 반대하다 귀양살이를 했고,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사람들은 광해군을 처형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반대하여 유배에 그치게 했다. 


이러한 무수한 업적보다 빛나는 것은 이원익의 청렴한 삶, 그 자체다. 한 나라의 재상으로 5번씩이나 영의정을 재임했으면 대궐 못지않은 으리으리한 집에서 하인을 거느리며 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의 소탈한 성품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퇴임 후에 이원익은 초라한 초가집에서 스스로 농사짓고 돗자리를 만들어 팔아 생활하였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청백리 


충현관을 나오면 최근 복원된 풍욕대(風浴坮), 삼상대(三相臺) 정자를 만난다. 밑동 굵은 소나무와 어우러진 정자에서는 조선시대 선비의 담백한 옛 풍류도 엿볼 수 있다. 정자를 지나면 관감당으로 이어진다. 관감당은 인조가 이원익에게 하사한 집이다. 인조는 존경하는 이원익이 초가집에서 사는 것이 몹시 안쓰러웠던 것이다. 이원익이 극구 사양하자 인조는 “경을 위하여 집을 지어 준 것은 백성과 신하들로 하여금 느끼는 바가 있게 하려 함이요”라고 하여 이원익의 고집을 꺾을 수 있었다. 관감당 앞에는 탄금암(彈琴岩) 바위와 400년 수령의 측백나무가 어울려 한국의 전통 정원(庭園) 같은 시원한 풍경을 선사한다. 탄금암은 이원익이 앉아 거문고를 튕겼다고 전해지는 바위다. 나무 그늘이 내려온 바위에 앉으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세상 사람 중에 형제가 화목치 못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부잣집에서 그러하다. 


이는 재물이 있으면 다툴 마음이 생겨 천륜을 상하게 하니 재물이 바로 빌미가 


된다는 것을 알겠다. 자손들은 절대로 옳지 못한 재물을 모으지 말고 불인(不仁)한 


부(富)를 경영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농사에 힘써 굶어 죽는 것을 면하면 옳을 뿐이다.



이원익의 유서 중에서 자손들에게 남긴 말이다. 평생 재물을 모으지 않았던 자신의 소신이 잘 드러나 있다. 욕심이 없어 그런지 이원익은 88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가냘픈 몸에  후덕한 인품을 가진 이원익의 정치적, 육체적 장수의 비결은 청렴함과 도덕성에 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청렴한 청백리를 꼽는데 이원익의 이름을 빼놓지 않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누가 이원익을 차마 속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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